시간과 영원의 경계를 사진으로 탐구한 작가
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
히로시 스기모토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시간, 기억, 역사,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온 세계적인 예술가이다. 그는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서, 인간의 의식 너머에 있는 개념적 시간을 시각화한다. 그의 작품은 한눈에 보기에는 정적인 흑백사진이지만, 그 안에는 수천 년의 시간과 철학적 사유가 녹아 있다. 스기모토는 극장, 바다, 박물관의 디오라마, 건축물 등을 소재로 삼아 인간 인식의 한계를 시험하며, "사진이란 무엇을 보는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1. 작가 소개와 철학적 배경
히로시 스기모토는 194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197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의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에서 사진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초기에는 광고 사진을 찍었지만, 곧 철학적 사유를 담은 순수예술로 전향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단순한 형상이나 장면을 넘어서, 시간성과 존재, 기억과 인식의 모호한 경계를 시각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볼 수 없는 시간의 층위를 포착하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기모토는 고전적인 대형 카메라를 사용해 장노출, 완전 수동 촬영, 흑백 필름 현상 등의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며, 디지털 시대에 역행하는 아날로그적 접근으로 오히려 더 강한 미학적 감동을 준다.
2. 극장 시리즈: 빛으로 시간을 기록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시리즈 중 하나는 <Theaters(극장)> 시리즈이다. 이 작품은 빈 극장의 스크린을 카메라로 장시간 노출해, 영화 한 편이 상영되는 전체 시간을 하나의 프레임에 담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놀랍게도, 그 결과 스크린은 새하얗게 빛나는 백색 면으로 남는다. 관객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그 안에는 2시간짜리 영화의 모든 이미지가 '빛'으로 응축되어 있다. 이 시리즈는 시간과 이미지, 기억의 관계를 정지된 프레임으로 고요하게 사유하게 만든다.
대표작: "Cinema Dome, Hollywood", "Fox Theater, Detroit" 등
3. 바다 시리즈: 존재 이전의 원형 풍경
<Seascapes(바다)> 시리즈는 히로시 스기모토의 철학적 세계를 가장 순수하게 보여주는 연작이다. 그는 전 세계 수십 개국의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을 촬영하며,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풍경, 즉 문명 이전의 ‘순수한 시간’을 이미지로 구현한다.
모든 사진은 흑백이고, 중앙에는 정확한 수평선이 배치되어 있으며, 바다와 하늘만이 존재한다. 이 시리즈는 **존재론적 질문(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시각적 명상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작: “Caribbean Sea, Jamaica”, “Bay of Sagami, Atami”
4. 디오라마 시리즈: 허구를 사실처럼 보이게 하다
스기모토는 자연사 박물관의 동물 디오라마를 촬영하여 <Dioramas>라는 시리즈를 제작했다. 겉보기에는 진짜 야생동물을 찍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박제된 모형과 그림 배경이 전부다.
그는 이를 통해 사진이 얼마나 쉽게 현실처럼 위장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사진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건드린 작업 중 하나로 평가된다.
대표작: "Polar Bear ", " Gorilla", "Wolves"
5. 초상 시리즈: 역사적 인물의 재현
스기모토는 밀랍 인형 박물관에 전시된 역사적 인물의 모형을 촬영한 <Portraits> 시리즈도 진행했다. 이 시리즈는 디오라마 작업의 연장선으로, 완전히 조작된 인물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역설적인 시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헨리 8세, 나폴레옹 등 역사적 인물들이 사진 안에서는 마치 실존 인물처럼 등장한다. 이 작업은 역사, 실재, 기억, 재현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6. 건축 시리즈: 신성성과 질서
<Architecture> 시리즈에서는 르 코르뷔지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20세기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작품을 촬영한다.
스기모토는 단순한 건축 기록이 아니라, 건축이 지닌 기하학적 질서, 공간의 상징성, 시선의 구성에 집중한다. 그는 ‘건축은 인간의 의식을 가장 잘 반영하는 구조물’이라고 보고, 이를 철저한 구도로 해석한다.
대표작: "Villa Savoye ", " Guggenheim Museum"
7. 사찰과 철학 시리즈: 불교와 존재론
최근 작업 중에는 일본의 고대 사찰과 불교 건축, 불상 등을 촬영한 시리즈가 있다. 이는 스기모토가 고향으로 돌아가 동양 사상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며 시작된 작업이다.
불상이나 목조 건축을 단색 배경 위에서 명상적으로 촬영한 사진들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불교철학을 시각화한 조형적 사유의 결과물이다.
8. 형식적 특징과 사진 철학
스기모토의 모든 작품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
* 흑백 사진의 고전적 미학 : 컬러를 배제함으로써 시간과 본질에 집중한다.
* 대형 포맷 카메라 사용 : 디지털을 거부하고, 전통적 장비와 방식으로 사진 자체의 물성을 살린다.
* 장노출 기법 : 시간을 사진 안에 직접적으로 녹여내는 전략이다.
* 비개입적 시선 :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철저히 통제된 구도를 사용한다.
그는 사진을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닌, 철학적 사유를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9. 사진예술과 현대 미학에 끼친 영향
히로시 스기모토는 현대 사진예술을 조형예술, 철학, 건축, 종교와 결합시킨 작가다. 그는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등 주요 미술관에서 대형 개인전을 열었으며, 그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모마, 테이트 모던 등에 소장돼 있다.
특히 그가 보여준 시간과 사진의 관계, 현실과 이미지의 분리, 존재와 인식의 시각화는 거스키, 슈트루트, 버틴스키 등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 너머의 시간을 포착하는 예술가
히로시 스기모토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시간, 존재, 역사, 기억이라는 보이지 않는 개념을 시각화하려는 사유형 예술가다. 그의 사진은 감정적이지 않지만, 감동적이다. 조용하지만, 철학적 깊이는 깊다. 그는 사진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묻는다. 스기모토는 말한다.
"나는 존재의 이면을 보기 위해 셔터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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