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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 & 힐라 베허 (Bernd & Hilla Becher), 산업구조물의 미학을 구축한 사진예술의 선구자

애드 박 2025. 6. 28. 08:27

산업구조물의 미학을 구축한 사진예술의 선구자
베른트 & 힐라 베허 (Bernd & Hilla Becher)

 베른트 & 힐라 베허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산업화 시대의 구조물을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방식으로 기록해온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 부부다. 그들은 전통적 다큐멘터리 사진의 경계를 넘어, “기계적 건축물의 구조와 형태, 유형학(typology)”을 기반으로 사진을 배열하고 분류함으로써 전례 없는 새로운 시각 언어를 창조했다. 사진을 단순한 이미지 기록이 아닌 비교, 관찰, 분석이 가능한 구조적 데이터로 활용한 그들의 작업은 현대 미술사에서 개념적 사진의 시초이자 독일 사진교육의 토대로 평가된다.

Bernd & Hilla Becher Cooling Tower, Donawitz, AT , 1982
Bernd & Hilla Becher Cooling Tower, Donawitz, AT, 1982

1. 작가 소개 및 활동 배경

베른트 베허는 1931년 독일 지겐에서 태어났고, 힐라 베허는 1934년 베스탈리아의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1950년대 말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Kunstakademie Düsseldorf)"에서 만나 협업을 시작했고, 이후로도 평생을 함께 산업 건축물 촬영에 헌신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각기 그래픽 디자인과 조각을 전공했지만, 산업 유산의 기록이라는 공통된 관심을 바탕으로 사진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수단을 조형적, 개념적으로 확장시켰다. 1960년대부터 독일, 벨기에, 프랑스, 영국, 미국 등지를 돌며 탄광, 제철소, 수처리장, 저장탱크, 냉각탑 등 20세기 산업 문명의 구조물을 흑백 사진으로 정밀하게 기록했다.

2. 주제의식: 유형학적 기록과 건축의 질서

베허 부부는 자신들의 사진을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유형학적(typological) 작업으로 정의했다. 그들은 건축물의 외관, 크기, 형태, 비례 등을 비교할 수 있도록 같은 구도, 같은 거리, 같은 시점에서 여러 대상을 촬영했다.

이러한 방식은 르네상스적 회화의 원근법이나 고전 건축의 도감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 그들의 작업은 보는 행위 자체를 분석의 틀로 바꾼 실험적 시도였다그들은 특히 다음의 구조물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 냉각탑 (Cooling towers)
  • 사일로 (Silos)
  • 가스 저장탱크 (Gas holders)
  • 고로 (Blast furnaces)
  • 수처리탑 (Water towers)

이러한 주제들은 산업화된 근대 문명의 상징이자, 점차 사라져가는 기억의 유산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3. 사진 방식과 형식적 전략

베허 부부는 항상 동일한 조건을 충족한 상태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이 방식은 마치 과학 실험에서 변수 통제를 통해 비교 가능한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과 유사하다그들의 형식적 전략은 다음과 같다:

흑백 사진만 사용하여 색의 감성적 요소를 배제하고, 구조 자체의 미학에 집중했고, 구름 없는 흐린 날 촬영하여 그림자와 명암을 최소화하여 형태 인식에 방해되는 요소 제거하였고, 중심 정렬, 직각 시점을 사용하여 건물의 축과 평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구도를 사용하였으며, 동일한 주제의 구조물을 4×3 또는 3×3 등 격자 형태로 배열하는 시리즈 배열 방식으로  비교 가능하게 구성, 그 결과, 개별 사진은 사실을 담고 있지만, 시리즈 전체는 조형적 리듬과 개념적 질서를 형성한다.

4. 조형예술과 다큐멘터리의 경계 허물기

베허 부부는 다큐멘터리와 조형예술 사이의 전통적 구분을 무력화했다. 그들은 사라져가는 산업 구조물들을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고자 했지만, 그 방식을 통해 오히려 사진의 조형적 가능성과 개념적 층위를 더 깊게 열었다.

그들의 사진은 단순히 '보여주기'보다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구조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방식은 후대 사진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안드레아스 거스키, 토마스 슈트루트, 칸디다 회퍼 등은 베허 부부의 제자이자 베허 학파(Becher School)’라 불릴 정도로 사진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전통을 계승했다.

5. 예술사적 위치와 전 세계적 영향

베허 부부는 1972년 문서(Documenta 5) 전시를 시작으로 베니스 비엔날레, 뉴욕 MoMA, 런던 테이트 모던 등에서 대규모 전시를 진행했고, 현대사진의 제도화와 이론화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특히 그들이 이룬 중요한 전환점은 다음과 같다:

  • 사진을 회화나 조각처럼 전시할 수 있는 조형적 오브제로 만든 점
  • 사진을 비평, 기록, 철학이 결합된 시각 언어로 정립한 점
  • 시리즈화된 유형학 작업을 통해 새로운 아카이브적 접근 방식을 만든 점

그들의 작업은 현대 건축사, 산업사, 도시학, 미술사 등 다양한 학문과의 인터디시플리너리(Interdisciplinary) 연계를 가능케 했다.

시간의 조각을 질서로 환원한 시각 기록자

베른트 & 힐라 베허의 사진은 구조물의 초상을 닮았다. 사람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문명의 유산을 얼굴처럼 정면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들의 방식은 철저한 객관성과 구조적 엄밀함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사진을 통한 사유와 비교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들이 남긴 수천 장의 구조물 사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풍경의 잔재이자, 질서 있게 배열된 기억의 저장소이다.